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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쓰다 ①

2025.11.19

대구세계육상선수권, 인천아시안게임, 평창올림픽. 

이름만 들어도 규모가 짐작되는 국가이벤트 현장에서 수십억 명에게 ’감동의 한 순간’을 선사하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엔피의 백승업 대표. 사원에서 시작해 지금의 엔피를 이끄는 대표가 되었습니다.

 

현실과 버추얼 경험을 결합한 XR STAGE, 콘텐츠의 새로운 문법을 제시한 숏드라마, 명상의 방식을 다시 정의한 XR 명상앱 무아(MUA)까지. 

그의 무대는 현장을 넘어 더 넓은 콘텐츠 세계로 자연스럽게 확장됐습니다.

 

언뜻 보면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입니다. 글로벌 이벤트, 버추얼 스튜디오, XR 명상 앱, 드라마 제작. 

하지만 모든 일의 중심에는 단 하나의 기준이 있습니다. 

'경험을 만드는 일'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연출가가 어떻게 새로운 사업을 설계하고 기술과 콘텐츠의 흐름을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었을까?

 

‘경험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쓰다’ 1 에서는 위기의 순간과 수많은 시행착오들이 어떤 기준과 감각을 만들어 주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의 엔피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그 출발점을 따라갑니다.

 

 


 

 

 

 

Perspective 1. 우연에서 운명으로

 

Q. BTL일의 시작은 어땠나요?

 

IMF 이후 대한민국은 큰 변화를 겪고 있었고, 모두가 새로운 길을 고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 역시 막막함 속에 있었죠. 

그때 BTL 업계에서 일하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지방 투어를 도는데, 운전만 좀 도와주면 돼.” 

가벼운 제안이었지만, 그 전화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2003년, 짐을 싸 들고 서울로 올라왔고 바로 첫 현장인 삼성 디지털 포럼 전국 투어에 투입됐습니다. 

별일 아니라던 말과 달리 조명 설치부터 케이터링 세팅, 운송까지 사람이 부족하면 뭐든 직접 뛰어야 했습니다. 

전시 구조물이 출입문을 통과하지 못해 창문을 뜯어낸 적도 있고, 유리문이 깨져 응급실로 뛰어간 날도 있었죠. 

밤새 행사장 세팅을 마친 새벽, 화장실에서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잠깐 눈을 붙이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Q. 왜 힘든 그 일을 계속할 마음이 들었나요?

 

혼란스러운 현장이었는데 이상하게 재미있었습니다. 

지시 한마디에 사람들이 움직이고, 여러 팀이 맞물리며 무대가 완성되는 과정이 또렷하게 보였어요.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 이게 나한테 맞는 일이구나’라고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일의 끝에는 늘 같은 장면을 경험했어요. 

막이 내리고 동료들이 “수고했습니다”라고 건네는 순간의 안도감과 성취감, 사람에 대한 고마움이 이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었어요.

 

 

 

Q.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요?

 

현장은 늘 숨 돌릴 틈이 없었습니다. 밥을 먹을 시간도 없었죠. 하루는 너무 배고픈 나머지 잠깐 가까운 편의점에 들어가 삼각김밥을 먹은 적이 있어요.

그때 창밖으로 지나가던 선배들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다들 바쁜데, 혼자 밥을 먹네’라는 시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이 이상하게 마음에 박혔어요. 그 뒤로는 현장에서 밥을 잘 안먹게 되었어요. 

‘혹시 내가 밥 먹는 동안 사고가 나면 어떡하지’, ‘내가 자리를 비워서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었죠.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젠 일부러라도 후배들과 함께 밥을 먹습니다. 

제가 밥을 미루면 오히려 후배들이 불편해하고, 함께 식사하는 그 자체에도 팀을 움직이는 힘이 있더라구요.

예전엔 현장을 지키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사람을 챙기는게 현장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게 결국 더 좋은 무대를 만드는 힘이니까요.

 

  

 

 

Q. 사원 시절의 백승업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사원 시절의 저는 잘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묵묵히 하기 보다는, 하면 티나게 잘하고 싶었죠. 그 마음 하나로 누구보다 빨리 움직였습니다. 

행사가 끝나면 바로 다음 현장으로 넘어가고, 주말도 없이 일했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기회가 보이면 더 해보려고 했어요. 

그 덕분에 여러 일을 몸으로 겪을 수 있었고, 돌아보면 그 시절의 열정이 지금의 저를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Q. 현장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생각해보니, 현장이 제게 남긴 건 두 가지였습니다. ‘판단력’과 ‘기준’ 처음엔 모든 게 낯설어, 보이는 것 하나하나가 배움이었습니다. 

기획도, 매뉴얼도, 연출도 빠르게 흡수했고, 그러는 사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는 감각이 자랐습니다.

태도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누가 어떻게 일하는지, 어떤 태도가 현장을 무너뜨리는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으면서 깨달았죠. 

 

그때 가장 많이 고민한 단어가 ‘다름’과 ‘틀림’이었습니다. 초기엔 나와 다른 방식이면 쉽게 ‘틀렸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일할수록 분명해졌습니다. 다르다고 틀린 건 아니다.

예전엔 정답을 찾으려 했다면, 지금은 여러 방향의 가능성을 먼저 봅니다. 

당시 조직 분위기는 다른 의견을 내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답답했던 기억 때문인지 지금은 그 반대로 하려합니다.

회의에서 누군가 다른 생각을 이야기하면 “왜 그렇게 봤는지, 무엇이 걸렸는지”를 먼저 듣습니다. 

틀렸다고 잘라 말하는 대신 이유를 나누고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Perspective 2. 다시 없을 순간을 다루는 일



Q. 연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나요?

 

2003년, 시청광장에서 열린 ‘거리 응원전’이었어요. 월드컵 1주년을 맞아 진행된 이벤트였죠.

행사 도중 큐시트를 교체하러 처음 콘솔 위에 올랐습니다. 그 순간 보이는 풍경이 완전히 달랐어요. 

수천 명의 인파. 조명과 음악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그리고 연출가의 한마디에 바뀌는 장면들.

 

그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하나의 그림처럼 이어지고, 그 흐름이 무대의 순간을 완성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언젠가 저 자리에서 전체를 바라보고 싶다. 

그게 연출에 대한 저의 첫 확신이었습니다.

 


 

 

 

Q. 처음 맡은 연출은 어떤 현장이었나요?

 

넥슨 한가족 체육대회였어요. 그 동안 체육대회 현장 경험이 많았지만, '네가 한번 연출해봐'라는 제안을 받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복잡한 행사는 아니었습니다. 레크레이션과 시상식, 축하공연이 메인 프로그램이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작은 무대였지만, 그때의 저는 그 무대를 세상에서 가장 큰 행사처럼 느꼈습니다.

얼마나 긴장했냐면, 사회자 멘트부터 음악과 조명 타이밍까지 시나리오를 통째로 외워갔을 정도였어요. 

 

하지만 막상 현장에 들어서자, 무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렀고 제가 밤새 준비한 것들은 거의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큐 사인을 주는 것조차 어색해서 “음향… 준비되셨나요?”라고 말할 때 손에 땀이 맺힐 정도였죠.

그때 연출가는 ‘모든걸 외워서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Q.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코로나19로 거의 모든 행사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던 시기였습니다. 

갤럭시 팬파티에서 온라인 퀴즈쇼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수천 명이 동시에 접속하자마자 서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버는 저희가 직접 준비한 영역이 아니었던 터라 더 당황스러운 변수였어요. 

화면은 멈추고, 음성도 끊기고, 미리 준비하고 리허설까지 마쳤던 시나리오는 한순간 무용지물이 됐죠. 

그때부터는 오롯이 멘탈과 임기응변의 시간이었습니다. 사회자에게 실시간으로 멘트를 전달하고, 흐름이 끊기지 않게 분위기를 붙잡는 데 집중했어요.

현장은 늘 예측 밖에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죠. 그 상황에서 지금 가능한 최선을 만드는 것, 그게 연출이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Q. 반대로 성공적이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2018 평창올림픽, 그리고 삼성 갤럭시 언팩두 장면이 떠오릅니다. 

먼저 평창올림픽에서는 가장 오래 논의가 이어졌던 성화 점화 시퀀스가 기억에 남아요. 

성화대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성화 점화 직전에 눈처럼 계단이 열리고 선수들이 그 위로 오르는 장면을 제안했습니다. 

그 아이디어가 그대로 반영됐고, 조명·음향·카메라·동선이 한 타이밍에 맞아떨어지는 순간 전율이 왔습니다. 

그때 처음 “연출이 완성된다”는 감정을 제대로 느꼈어요.

  

 
  

삼성 갤럭시 언팩에서는 ‘올림픽만큼 와우한 순간을 만들자’는 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영상으로 언팩의 시그니처인 박스가 열리는 효과를 만들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저는 영상 대신 실제 9m 박스를 무대에 세우자고 제안했습니다. 

물리적인 위험도 있었고 제작비 부담도 컸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박스가 열리는 순간이 주는 감동은 CG가 줄 수 없는 종류의 경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행사 당일, 거대한 박스가 열리는 순간 관객들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시던 그 정적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두 경험은 저에게 같은 확신을 주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기술보다는 사람이 만들고, 진짜 감정은 항상 ‘직접 경험한 순간’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Q. 연출할 때 여전히 떨리시나요?

 

그럼요. 지금도 늘 긴장합니다. 수없이 해온 일이지만 한 번의 실수가 전체 호흡을 바꿔버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예전엔 시나리오를 통째로 외웠지만 지금은 그러진 않습니다. 대신 시나리오를 계속 확인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지 않았는데 마지막 멘트처럼 들려 조명이나 음악을 시작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그 한 박자 차이가 장면의 리듬을 깨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큐 사인을 줄 때 시나리오의 문장, 말의 어조, 현장의 호흡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Q. 대표님에게 ‘연출’은 무엇인가요?

 

저에게 연출은 기획의 마지막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 기획이 제가 만든 것이든, 후배의 아이디어든 상관없습니다. 

누군가가 의도를 담아 준비한 콘텐츠를 현장에서 어떤 효과, 영상, 타이밍으로 구현하느냐에 따라 전달되는 감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전화를 돌리고, 레퍼런스를 찾고, 밤새 문서를 정리하며, 머릿속에 그려온 장면들이 있잖아요. 

연출은 그 상상의 ‘최종 그림’을 현장에서 실제로 만들어내는 역할입니다.

 

특히 이벤트 연출은 디테일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카메라 컷, 조명, 음향, 동선, 타이밍까지 하나만 어긋나도 바로 다 드러나니까요. 

방송 녹화는 ‘다시’가 가능하지만 이벤트 현장은 단 한 번뿐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리스크가 크고, 그만큼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시도는 쉽게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도전을 피할 순 없습니다. 저는 후배들에게 늘 말합니다. 

“리스크 때문에 포기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만큼 철저히 준비해서 시도하자.” 

결국 이벤트는 다시 없는 순간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준비된 도전만이 현장에서 진짜 힘을 발휘합니다.

 

 

 

Q. 이 일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연출의 매력은 끝단에서 모든 걸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는 겁니다.

현장은 늘 긴장돼 있고, 순간의 판단 하나로 전체 결과가 달라지죠. 그럴 때면 스태프들의 시선이 모두 제 뒤에 꽂혀 있는 기분입니다. 

스포츠로 치면 마운드에 선 선발 투수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책임도, 결정도, 마지막 선택도 결국 제 몫이니까요. 

 

그 중압감을 견디고, 현장이 의도한 방향으로 정확하게 굴러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느껴지는 해방감과 성취감이 이 일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온몸이 긴장에서 풀리는 그 순간, ‘그래서 내가 이 일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Q. 무엇보다 팀의 호흡이 중요할 것 같은데요, 현장에서 팀을 하나로 만드는 대표님만의 방식이 있나요?

 

저는 먼저 사람을 믿습니다. 같이 일하는 팀은 물론이고,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택배 기사님까지요. 

내가 믿지 않고 말하면 그 미세한 감정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그런 현장은 절대 하나로 움직이지 않아요. 

그래서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반드시 해낼 거다.” 그 믿음이 기본값이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내가 그만큼의 신뢰를 주는 사람인가를 스스로 확인하는 일입니다. 

연출은 단순히 사인만 주는 자리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백스테이지부터 로비, 객석까지 모두 감싸안아야 하는 자리죠. 

어떤 상황이 와도 “그래도 저 사람이 있으면 괜찮다” 이 생각을 팀에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 믿음을 만들고 유지하는 게 연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현장에 갑니다.

 


 

 

 

돌아보면, 그는 늘 현장에서 배웠습니다. 그 시간들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가장 솔직한 기준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사람을 먼저 믿을 것.’ ‘다름을 두려워하지 말 것.’ ‘한 번뿐인 순간에 끝까지 책임질 것.’ 

그 기준은 지금도 그의 일하는 방식과 선택,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남아 있습니다.

 

경험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쓰다② 에서는 경험을 만드는 사람에서

경험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으로 확장된 그의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